주교좌 원동 성당
개요
원동 주교좌성당은 강원도 원주시 원동에 있는 천주교 원주교구의 주교좌 본당이다. 1896년 8월 17일 풍수원 본당에서 분리·신설된 원주본당이 모태로, 1957년 6월 1일 ‘원동’으로 이름이 바뀌었고 1965년 6월 주교좌성당이 되었다. 1954년에 재건된 현재 성당 건물은 2004년 12월 31일 근대문화유산 등록문화재 제139호로 등록되었으며, 국가유산 디지털 서비스에는 국가등록문화유산으로 올라 있다.
역사
〔설립〕 한국가톨릭대사전에 따르면 부엉골 본당의 부이용 신부가 1895년 본당을 장호원으로 옮길 계획을 세우면서, 풍수원과의 거리가 멀어지므로 풍수원 본당의 르 메르 신부와 의논해 원주에 본당을 세우기로 합의했다. 르 메르 신부는 1896년 원주읍 상동리(현 가톨릭센터 자리)의 대지 350평과 기와집 16칸을 사들인 뒤, 그해 8월 17일 풍수원 본당을 정규하(아우구스티노) 신부에게 맡기고 원주(현 원동 주교좌) 본당의 초대 주임으로 부임했다. 본당 설립 당시 관할 공소는 20개, 교우는 1,137명이었다. 원주 읍내에는 신자가 몇 명뿐이고 대부분의 교우가 공소에 있어 르 메르 신부는 주로 공소를 순방하며 사목했고, 공소 순방에는 보통 한 달이 걸렸다. 국가유산 디지털 서비스도 1896년 8월 17일 초대 르 메르 신부가 부임하면서 성당이 건립되었다고 적는다.
〔1900~1930년대〕 한국가톨릭대사전은 2대 주임 리굴로 신부가 원주 군수의 악의적 태도와 읍내 입교자가 없는 상황 때문에 본당을 시골로 옮기려 했으나 1900년 3월 장티푸스로 선종했다고 적는다. 3대 드브레 신부 때 신자가 늘어 성당이 좁아지자 1902년 사제관 부근의 가옥 열두 채와 부지 2,000평을 사들여 오늘의 성당 터전을 마련했고, 1904년 4월 용소막 공소를 본당으로 승격·분리했다. 4대 시잘레 신부는 성당 신축을 위해 목재를 비축하다 1908년 8월 신학교로 돌아갔다. 5대 조제 신부는 성당 부속 건물에 야학을 열었으나 1910년 8월 22일 한일합병과 함께 일제에 의해 폐쇄되었고, 1913년 건평 70평의 고딕식 성당을 완공해 뮈텔 주교의 주례로 봉헌식을 거행했다. 조제 신부는 이듬해 8월 제1차 세계대전에 참전하려 귀국했다가 1919년 10월 본당에 돌아와 1923년 3월 서울교구 청경리 신부로 전임했다. 한국인 사제인 9대 정규량 신부는 1930년 3월 횡성 공소를 본당으로 승격·분리했고, 1931년 1월과 1936년 12월 봉산동 임야를 사들여 교회 묘지를 조성했으며, 1931년 4년제 강습소인 소화학원을, 1934년 소화유치원을 설립하고 같은 해 9월 샬트르 성 바오로 수녀회 분원을 마련했다. 소화학원은 1937년 일제의 탄압으로 폐쇄되었고, 정규량 신부는 1937년 12월 24일 가톨릭 청년회를 조직하고 1938년 문막 공소를 설립했다.
〔1939~1950년〕 1939년 4월 춘천교구가 서울교구에서 분리·설정되면서 이 지역 사목은 골롬반 외방선교회가 맡았고, 버넌 신부가 1939년 7월 11대 주임으로 부임했으나 1941년 12월 일제에 의해 감옥에 갇혔다가 미국으로 추방되었다(한국가톨릭대사전). 이어 서울교구 소속의 김교명·박일규 신부가 12·13대 주임으로 사목했다. 박일규 신부는 1941년 최양업 신부의 묘비를 세우려다 일본 경찰의 제지로 뜻을 이루지 못하다가 광복 후인 1945년 9월 제막식을 거행했고, 일본군이 성당 종을 가져가려 하자 성당 문을 막아서며 저지했다. 광복 후에는 골롬반 외방선교회의 디어리 신부가 14대 주임으로 부임했다.
〔6·25전쟁과 재건〕 한국가톨릭대사전과 굿뉴스 성지 소개에 따르면 디어리 신부가 17대 주임으로 부임한 지 얼마 안 되어 6·25전쟁이 발발해 성당과 1934년 설립된 소화유치원이 전소되었다. 샬트르 성 바오로 수녀회는 1950년 9월 분원을 철수했다. 부산으로 피난했다가 본국에 갔던 디어리 신부는 1951년 10월 돌아와 불탄 벽돌을 모아 소성당과 창고·사택을 짓고, 3개월 뒤 50평의 성당을 완공해 300여 명의 교우와 봉헌식을 가졌다. 1954년 9월에는 120평 규모의 시멘트 벽돌 성당을 완공했고, 그해 10월 교구장 퀸란 주교의 집전으로 봉헌식이 거행되었다. 디어리 신부는 1952년 가을 조상준(베르나르도)이 기증한 대지(121평)에 후리사 공소 강당(31평)을 지어 축복식을 하고, 1953년 사제리 공소를 폐쇄해 대안리 공소로 합치고 매지리 공소를 설립했으며, 1954년 3월 대안리 공소를 분리해 술미 공소를 설립하고 그해 말 흥업 공소를 설립했다. 사전은 이런 활동으로 1954년 말 원동 본당이 강원도 16개 본당 가운데 교세가 가장 높았다고 적는다.
〔본당 분할과 주교좌성당〕 한국가톨릭대사전에 따르면 18대 양대석 신부는 1955년 2월 부임해 학성동 872번지 877평을 학성동 성당 부지로 매입했고, 1956년 3월 레지오 마리애를 원주 본당에 처음 도입해 ‘천주 성총의 모친’ 쁘레시디움을 창단했다. 사전은 본당 명칭을 원주에서 원동으로 바꾼 시기를 개요에서는 1957년 6월 1일 학성동 본당을 분할할 때로 적고, 본문 서술에서는 1956년 항목의 6월 학성동 본당 분리·설정 때로 적어 연도 표기가 일치하지 않는다. 1960년 12월 단구동 본당을 분리·설정했고, 1963년 10월 영원한 도움의 성모 수녀회 분원을 마련했다. 1965년 3월 춘천교구에서 원주교구가 분리·설정되면서 원동 본당은 원주교구에 속하게 되었고 그해 6월 주교좌성당이 되어, 교구장 주교가 주관하는 모든 예식이 원동 본당에서 거행되었다. 1966년 2월 최초의 본당 주보를 발행했으며, 이 주보가 오늘날 교구 주보 《들빛》의 밑거름이 되었다고 한다.
〔1960~1970년대〕 19대 최창규 신부는 라틴어 교적과 성사 대장을 한글로 바꾸고 제대를 향하던 미사를 신자들을 향한 미사로 바꾸도록 성당 내부 시설을 고쳤으며, 재임 중 11월에 본당 교우 35명이 출자한 자본금 64,100원으로 원주 신용 협동 조합을 창립했고 1967년 2월 샬트르 성 바오로 수녀회 분원을 재마련해 소화유치원의 인가를 받았다(한국가톨릭대사전). 20대 주임은 지학순 다니엘 신부(1969.5~11)였고, 21대 이학근 신부 때인 1970년 1월 매지리 공소를 단구동 본당으로 이관하고 금대리 공소를 폐쇄했다. 22대 이영섭 신부 때 1972년 5월 봉산동 본당, 1976년 4월 일산동 본당이 분리·설정되었다.
〔민주화 운동의 중심지〕 한국가톨릭대사전과 굿뉴스 성지 소개에 따르면 1971년 10월 5일부터 7일까지 원주 문화방송국의 부정으로 야기된 원주교구의 부정부패 규탄 대회가 원동 본당에서 열렸고, 1974년 7월 6일 지학순 주교 구속 이후 천주교정의구현사제단이 결성되어 첫 기도회를 가지는 등 시국과 관련한 많은 기도회가 이곳에서 개최되어 1970년대 민주화 운동의 중심지로 떠올랐다. 국가유산 디지털 서비스는 유신정권 시절 민주화 운동에 한 획을 그은 지학순 주교가 ‘원주선언’을 한 곳이라고 설명한다. 25대 안승길 신부는 1984년 3월 주보에 ‘종소리’ 난을 신설해 본당 소식과 사회 문제, 시국 문제 기사를 실었다.
〔1980년대 말~2000년대 초〕 26대 이규영 신부는 1989년 3월 《원동 가족》 창간호를 발행했고 7월 5층 규모(연건평 600평)의 ‘본당 설립 100주년 기념 교육관’ 기공식을 가졌으며, 이 교육관은 1990년 8월 지학순 주교가 참석한 가운데 축복식을 했다. 28대 박무학 신부는 1995년 5월 원주 지구가 제1지구와 제2지구로 나뉘면서 원주 제1지구장에 선임되었고, 같은 해 7월부터 성당·수녀원·교육관을 수리했으며 10월 본당 100년사 편찬위원회를 구성했다. 1996년 10월에는 교구장 김지석 주교와 교황대사 불라이티스 대주교, 골롬반 외방선교회 신부, 교구 사제단이 공동 집전한 본당 설립 100주년 기념 미사를 봉헌했고, 1998년 2월 구곡 본당을 분리·설정했으며, 1999년 1월 《원동 백년사》를 간행했다. 29대 김용성 신부는 2001년 7월 본당과 거리가 먼 흥업면을 자치 구역으로 분리했고 9월 술미 공소 강당을 수리해 축복했다.
〔문화유산 등록과 보수〕 굿뉴스 성지 소개는 원동성당이 돔형 종탑의 독특성과 양호한 보존 상태, 1970년대 민주화 운동과의 관련성을 인정받아 2004년 12월 31일 근대문화유산 등록문화재 제139호로 지정되었고, 2016년 본당 설립 120주년을 기념해 문화재청과 원주시의 지원으로 성당 내외부 복원 공사를 시행했다고 적는다. 국가유산 디지털 서비스의 연혁은 2011년과 2011~2012년 성당 보수정비, 2014년 문화재 특별 종합점검(양호), 2015년 내부 바닥 원형 복원, 2018년 종합 보수를 기록한다.
〔교세와 역대 주임 신부〕 한국가톨릭대사전이 적는 교세는 1896년 1,137명, 1903년 1,678명, 1913년 1,345명, 1923년 1,268명, 1937년 1,193명, 1947년 1,659명, 1957년 2,842명, 1967년 3,206명, 1977년 3,001명, 1987년 3,221명, 1996년 5,136명, 2000년 4,174명이며, 관할 공소는 대안리·술미·귀래 3개소이다. 역대 주임 신부는 초대 르 메르 루도비코(1896.8~1898.6), 2대 리굴로 안토니오(1898.6~1900.3), 3대 드브레 에밀리오(1900.5~1906.8), 4대 시잘레 베드로(1906.8~1908.8), 5대 조제 요셉(1909.1~1914.8), 6대 시잘레(1914.8~1919.8), 7대 조제(1919.8~1923.3), 임시 이보환 요셉(1923.3~6), 8대 폴리 데시데라도(1923.6~1928.5), 9대 정규량 레오(1928.5~1938.10), 10대 유영근 요한(1939.1~7), 11대 버넌 파트리치오(1939.7~1941.12), 12대 김교명 베네딕도(1941.12~1942.1), 13대 박일규 안드레아(1942.2~1945.11), 14대 디어리 파트리치오(1945.11~1948.1), 15대 레일리 파트리치오(1948.1~1949.8), 16대 코머포드 토마스(1949.8~1950.6), 17대 디어리(1950.6~1955.2), 18대 양대석 알로이시오(1955.2~1966.10), 19대 최창규 바르톨로메오(1966.10~1969.5), 20대 지학순 다니엘(1969.5~11), 21대 이학근 베네딕도(1969.11~1971.4), 22대 이영섭 프란치스코(1971.4~1976.4), 23대 최기식 베네딕도(1976.4~1979.3), 24대 김지석 야고보(1979.3~1983.5), 25대 안승길 로베르토(1983.5~1987.9), 26대 이규영 마르코(1987.9~1991.1), 27대 이흥근 마르코(1991.1~1995.2), 28대 박무학 요한(1995.2~1999.2), 29대 김용성 타데오(1999.2~)이다. 마지막 항목의 ‘~’ 뒤가 비어 있는 것은 사전 서술 시점의 재임을 뜻한다.
건축과 공간
국가유산 디지털 서비스에 따르면 원주 원동성당은 1동 1층, 건축면적 689.25㎡로 1954년에 건립된 건물이며, 소유자는 (재)천주교원주교구유지재단이다. 장방형 평면으로 폭에 비해 길이가 매우 길고, 정면 중앙 종탑의 윗부분은 돔형이다. 외벽은 인조석 물씻기로 처리하고 줄눈을 사용해 석조처럼 보이게 했으며 건립 당시 원형이 잘 보존되어 있다고 설명한다. 같은 설명은 전후 복구된 성당 건축으로는 드물게 형식적 완성도가 높다고 평가한다.
건립 경위는 국가유산 디지털 서비스가 1953년 말 성이 ‘가’씨인 중국인이 기본설계와 공사계획을 수립했고 1954년 본당 교우들의 성미운동과 노력봉사로 건립했다고 적는다. 굿뉴스 성지 소개의 사진 설명은 내부를 기둥 없는 강당형 공간으로 소개한다.
증축과 보수는 국가유산 디지털 서비스가 1976년 5월 20일 1층 수녀원·2층 강당(교리실) 증축, 1985년 6월 29일 교회 273㎡(연와조 함석 시멘트, 벽돌, 슬라브) 건립, 1990~1991년 동일 지번 내 지상 5층 건축물 건립·증축으로 기록한다. 연혁에는 이 밖에 1967년 내부공사(제대 바닥 교체, 고백소 위치 변경, 장궤틀이 있는 의자 마련, 대형 십자가 설치 등)과 사제관 수리·수녀원 개축, 1984년 회중석 마루를 인조대리석으로 교체, 1995년 고백실 앞 공적 보속함(애긍함 겸용) 설치가 적혀 있다.
관련 장소와 인물
- 풍수원성당: 원주본당이 1896년 분리되어 나온 모본당이다(한국가톨릭대사전, 굿뉴스).
- 용소막성당·횡성성당·문막성당: 용소막 공소는 1904년 4월 본당으로 승격·분리되었고, 횡성 공소는 1930년 3월 본당으로 승격·분리되었으며, 문막 공소는 1938년 설립되었다(한국가톨릭대사전).
- 학성동·단구동·봉산동·일산동·구곡 본당: 원동 본당에서 분리·설정된 본당들로, 학성동은 1956년 6월(사전 본문) 또는 1957년 6월 1일(사전 개요), 단구동은 1960년 12월, 봉산동은 1972년 5월, 일산동은 1976년 4월, 구곡은 1998년 2월에 분리·설정되었다(한국가톨릭대사전).
- 대안리·술미·귀래 공소: 사전 서술 시점의 원동 본당 관할 공소이다(한국가톨릭대사전).
- 지학순 다니엘 주교: 1969년 5월부터 11월까지 20대 주임을 지냈고, 1974년 구속 이후 본당에서 시국 기도회가 이어졌으며 국가유산 디지털 서비스는 ‘원주선언’을 한 곳으로 설명한다.
- 르 메르(루도비코) 신부: 1896년 8월 원주본당의 초대 주임으로 부임한 신부이다(한국가톨릭대사전, 국가유산 디지털 서비스). 원주교구 교구소개는 원동 주교좌성당을 배론성지, 풍수원성당, 용소막성당, 강원감영 등과 함께 교구 안의 주요 성지·유적지로 꼽는다.
참고자료 및 출처
- 한국가톨릭대사전, “원동 주교좌 본당”. 1896년 설립 경위, 공소·본당 분리, 1913·1954년 성당 건립, 6·25전쟁 피해와 재건, 주교좌성당 지정, 민주화 운동, 교세와 역대 주임 29명.
https://encyclopedia.catholic.or.kr/entry/4801 - 천주교 굿뉴스, 성지와 사적지 “원동 주교좌성당”. 설립·성당 건립·6·25전쟁 피해·민주화 운동·100주년·문화재 등록과 120주년 복원 공사, 내부 사진 설명.
https://app.catholic.or.kr/web/holyplace/?seq=2838 - 국가유산청, 국가유산 디지털 서비스 “원주 원동성당”. 국가등록문화유산 개요, 1954년 건립과 설계 경위, 건축 특징과 증축·보수 연혁.
https://digital.khs.go.kr/heri/heriDetail.do?ctptNo=4413201390000&ctptUid=13898859680822301284 - 천주교 원주교구, 교구소개. 원주교구의 설정과 관할, 원동 주교좌성당을 포함한 주요 성지·유적지.
http://www.wjcatholic.or.kr/company/aboutu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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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 가톨릭 장소백과, "주교좌 원동 성당", 마지막 수정 2026년 10월 19일 16:12. https://missamap.com/ko/kr/wonju-wondong-catholic-church/wik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