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실 성당
개요
가실성당은 경상북도 칠곡군 왜관읍 낙산리에 있는 천주교 대구대교구 소속 성당이다. 파리외방선교회의 파이야스 신부가 설립했으며 경북 지역 초기 본당의 하나로, 현재 성당 건물과 사제관은 경상북도 유형문화유산으로 지정되어 있다. 주보성인은 성녀 안나이다.
역사
〔복음 전래〕 디지털칠곡문화대전은 낙산리 일대가 낙동강가의 작은 마을로 조선시대에 가실 나루터와 강창 나루터가 있어 수로 교통이 빈번했다고 설명한다. 이 출처는 1784년 한국 천주교 창립 시기에 이곳에서 한학을 공부하던 창녕 성씨 집안의 성섭이 만년에 천주교 진리를 받아들여 그 집안에 복음이 전해졌다고 전한다고 적는다. 성섭은 1788년 세상을 떠났고, 1791년 신해박해 혹은 1801년 신유박해 때 후손 일부는 성주 홈실로 피난하고 나머지는 가실에 남아 신앙생활을 이어 갔다. 성섭의 증손자 성순교는 1860년 경신박해 때 상주에서 순교한 것으로 가문에서 전한다고 한다.
〔본당 설립〕 한국가톨릭대사전은 박해가 끝난 뒤 경상도 전담 신부로 임명된 로베르(Robert) 신부가 신나무골에 거주하다가 1887년 대구 인근 새방골로 이주했고, 1894년에 입국한 파이야스(Camillus Paillhasse, 하경조) 신부가 그해 6월 신나무골에 와서 경상도 북부를 맡아 전교하다가 9월경 가실로 이주하면서 본당이 설립되었다고 적는다. 파이야스 신부는 김회두(베드로) 소유의 기와집 한 채를 사서 성당으로 삼았고, 당시 담당 전교 지역은 칠곡을 비롯해 성주·선산·문경·상주·함창·군위·안동·예천·의성·김천·거창·안의 등 경상도 북서부 일대와 충청도 황간, 전라도 무주 등지였으며 공소는 17개소, 신자 수는 777명이었다. 설립 시기는 출처마다 다르다. 한국가톨릭대사전은 설립일을 1894년 9월경으로 적고, 디지털칠곡문화대전은 동학혁명이 끝난 뒤 신자들의 도움으로 1895년 9월 정식으로 설립되었다고 적으며, 대구대교구 본당 정보는 설립일자를 1895년 6월 11일로 적는다. 디지털칠곡문화대전은 이 성당이 조선교구로서는 11번째, 대구교구에서는 계산성당 다음으로 세워진 본당이라고 적고, 설립 당시 본당 관할에 칠곡·성주·김천·선산·상주·문경·예천·군위·영천 지방의 31개 공소가 있었으며 본당 신부가 매 공소를 해마다 적어도 두 번 이상 말을 타거나 걸어서 순회했다고 적는다. 한국가톨릭대사전은 가실이 낙산리 본동의 옛 이름이며 훗날 ‘낙산본당’으로 개칭되었다고 설명한다.
〔초기 주임 신부〕 한국가톨릭대사전에 따르면 초대 파이야스 신부(1894.9~1898.6)가 황해도 장연의 두섭본당으로 전임한 뒤 2대 주임 김성학(알릭스) 신부가 부임해 3년간 전교하다가 1901년 김천본당을 분리·설립하며 이임했다. 3대 즈와요(Joyau) 알퐁소 신부는 1903년 성당을 증축하고 사제관을 신축했으며 신자 수를 부임 당시 800여 명에서 1,400명 정도로 늘렸으나, 나병에 걸려 1907년 1월 12일 30세로 병사했다. 뮈텔 주교는 소세(Saucet) 히폴리토 신부를 4대 주임으로 임명했고, 그는 5월에 부임했다. 가실본당은 1911년 4월 서울교구에서 대구교구가 분리 설정되면서 대구교구 소속이 되었다.
〔투르뇌 신부 시기〕 한국가톨릭대사전에 따르면 5대 주임 투르뇌(Tourneux, 여동선) 신부는 1912년 5월 29일 부임해 1944년 3월 지병으로 사망할 때까지 일제강점기 대부분을 이곳 신자들과 지냈다. 1922년에는 문경의 점촌본당과 상주의 퇴강본당이 분할되어 김천본당과 함께 관할 구역이 축소되었다. 신자들과 함께 성당과 사제관을 건립해 1925년 9월 28일 드망즈 주교가 참석한 가운데 교황 사절 지아르디니의 집전으로 성당 축성식을 거행했다. 이어 왜관 지역 전교에 힘써 1928년 2월 공소 신자들과 함께 성당 건축을 시작해 11월 준공하고 이듬해 5월 왜관본당을 분리했다. 세 번째 자본당인 왜관본당의 설립으로 가실본당은 위축되었고, 드망즈 주교는 1933년 가실본당을 노사제들을 위한 휴양 본당으로 설정했다. 1943년 2월 투르뇌 신부가 은퇴한 뒤 6대 주임으로 마산에 있던 베르몽(Bermond) 줄리앙 신부가 부임했고, 이때부터 ‘가실본당’은 ‘낙산본당’으로 불리게 되었다.
〔해방과 6·25전쟁 전후〕 한국가톨릭대사전에 따르면 1945년 3월 일제 총독부가 외국인 선교사들을 대구 남산본당에 감금하자 4월 13일 이명우(야고보) 신부가 왜관본당에 부임해 낙산본당의 7대 주임을 겸했다. 베르트랑(J. Bertrand) 신부가 8대 주임(1945.8~1946.1), 안국목(마가리노) 신부가 9대, 신상조(스데파노) 신부가 10대, 김영제(요한) 신부가 11대, 류선이(요셉) 신부가 12대 주임을 맡았고, 해방과 6·25전쟁을 전후해 주임 신부가 자주 교체되었으며 한때는 왜관본당 주임이 낙산본당 주임을 겸하기도 했다. 1952년 6월 왜관 감목대리구가 설정되면서 낙산본당도 이에 속하게 되었고, 베네딕도회의 최영호(비안네) 신부가 13대 주임으로 부임했다가 1953년 11월 점촌본당으로 이임했다. 14대 주임 뮐러(A. Müller) 안스가리오 신부 때 새로 서품된 김성도(모이세) 신부가 초대 보좌로 임명되었고, 1954년 12월 8일 본당 설정 60주년 행사와 이듬해 6월 12일 본당 최초의 성체 거동 행사가 열렸다. 1950년 6·25전쟁 때 낙산마을은 전투가 심해 파괴되었으나, 성당 건물은 인민군의 병원으로 쓰인 덕분에 그대로 남았다(디지털칠곡문화대전).
〔1960년대 이후〕 디지털칠곡문화대전에 따르면 제2차 바티칸 공의회의 새 전례에 따라 1964년 제대 쪽 구조를 많이 바꾸고 제의방을 만들기 위해 약간 확장했다. 이 출처는 대형 나무 십자가를 1964년에 안나상 대신 성당 안 제대에 모셨다고 적는다. 한국가톨릭대사전은 18대 주임 이동식(베네딕도) 신부 때인 1968년 9월 성체회 분원이 설립되었다가 1970년 8월 철수했고, 1970년대 중반 이후 농촌 인구의 도시 이주로 신자 수가 급감해 1980년대 이후 600~700명을 유지했다고 적는다. 1986년 1월 레지오 마리애를 도입했고, 1986년 2월 28일 왜관 감목대리구가 폐지되어 본당은 대구대교구 소속으로 바뀌었으며, 1990년 10월 설립 100주년 기념관을 건립했다. 1989년 1월 부임한 23대 주임 이동식 신부가 이어서 사목했다. 2000년 대희년에는 동양화가 손석희가 14처를, 독일 화가가 감실과 색유리화를 작품으로 내놓았고, 2004년에는 영화 〈신부수업〉의 촬영지가 되었으며, 2005년 1월 2일에는 1956년부터 불리던 ‘낙산성당’ 대신 원래 이름인 가실성당을 되찾았다. 가실(佳室)은 낙산의 옛 이름이고 아름다운 집이라는 뜻이며, 관련된 집은 성순교 가문의 집이라고 한다(디지털칠곡문화대전).
〔교세와 현황〕 한국가톨릭대사전이 적은 교세는 1894년 777명, 1903년 1,400명, 1965년 1,343명, 1971년 1,319명, 1978년 994명, 1983년 719명, 1988년 662명, 1993년 771명이다. 디지털칠곡문화대전은 2011년 현익현(바르톨로메오) 신부가 사임하고 황동환(이사악) 신부가 부임했으며 신자 수는 과거 1,000여 명이 넘었으나 관할 지역이 좁아지고 산업화·도시화로 500여 명으로 줄었다고 적는다. 관할구역은 왜관읍 낙산 1~3리, 금남 1~2리, 금산 1~2리 등이고, 하산공소는 대구광역시 달성군 하빈면 하산 1~2리, 본촌 1~2리 및 감문 1~2리를 관할한다.
건축과 공간
디지털칠곡문화대전에 따르면 현재의 가실성당 건물은 1922~1923년에 지어졌고 건축 양식은 신고딕 양식을 띤 로마네스크 양식이며 설계자는 프랑스인 박도행(V. L. Poisnel) 신부이다. 박도행 신부는 1896년부터 1925년까지 30년간 대구 계산성당과 칠곡 왜관성당을 비롯해 한국 천주교의 많은 교회 건축물을 설계했다. 공사는 중국 기술자들이 붉은 벽돌을 현장에서 구워 사용했고, 당시 본당 신부인 프랑스인 여동선(Victor Louis Tourneux) 신부가 벽돌을 한 장씩 두드려 확인하며 세웠다고 전한다. 한국가톨릭대사전의 낙산 본당 항목은 1925년 투르뇌 신부가 설계 감독하여 완공했다고 적는다.
디지털칠곡문화대전은 성당의 성모상은 건축할 때 프랑스에서 수입했고 액자는 중국에서 들여왔다고 적는다. 주보성인 안나는 1924년 이전에 프랑스에서 석고로 제작된 한국의 유일한 안나상이라고 하며, ‘엠마오’ 감실은 앞면이 칠보 작품으로 주제는 ‘엠마오’ 또는 ‘부활 감실’이다. 순교자 기념비는 약 200년 전 실학자 성섭의 가문을 기리고 증손자 성순교가 상주에서 순교한 것을 기린 기념비라고 한다. 같은 출처에 따르면 성당과 사제관은 2003년 경상북도 유형문화재 제348호로 지정되었고, 2021년 11월 19일 문화재청 고시로 지정번호가 폐지되어 경상북도 유형문화재로 재지정되었으며 2024년 5월 17일 「국가유산기본법」 시행에 따라 경상북도 유형문화유산으로 변경되었다.
관련 장소와 인물
- 왜관성당: 1929년 5월경 가실본당에서 분리·설립된 자본당이다(한국가톨릭대사전).
- 신나무골: 파이야스 신부가 1894년 6월 처음 도착해 머물던 곳이다(한국가톨릭대사전, 디지털칠곡문화대전).
- 김천본당: 1901년 가실본당에서 분리·설립되었다(한국가톨릭대사전).
- 점촌본당·퇴강본당: 1922년 가실본당에서 분할되었다(한국가톨릭대사전).
- 박도행(V. L. Poisnel) 신부: 디지털칠곡문화대전이 가실성당의 설계자로 적는 프랑스인 신부이다.
- 여동선(Victor Louis Tourneux) 신부: 1912년 5월 가실본당 5대 주임으로 부임해 1944년 3월 사망할 때까지 일제강점기 대부분을 이곳에서 지냈다(한국가톨릭대사전).
- 성섭·성순교: 가실에 복음이 전해진 창녕 성씨 집안의 학자와 그의 증손자이다(디지털칠곡문화대전).
참고자료 및 출처
- 한국학중앙연구원, 디지털칠곡문화대전 “칠곡 가실성당”. 설립 경위, 복음 전래, 건축 양식과 설계자, 6·25전쟁 때의 모습, 문화유산 지정 경과, 현황.
https://www.grandculture.net/chilgok/toc/GC02301443 - 한국가톨릭대사전, “낙산 본당”(2권). 설립, 역대 신부, 교세 통계, 분할과 변모, 성당 축성(1925), 왜관본당 분리.
https://encyclopedia.catholic.or.kr/entry/1028 - 한국가톨릭대사전, “가실 본당”(1권). 가실 본당의 설립 경위와 낙산본당 개칭.
https://encyclopedia.catholic.or.kr/entry/42 - 천주교 대구대교구, 본당 정보 “가실 성당”. 설립일자 1895년 6월 11일, 주보성인 성녀 안나.
https://www.daegu-archdiocese.or.kr/page/area.html?menu=c4&number=28&premenu=c1&srl=church_search&y_id=2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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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 가톨릭 장소백과, "가실 성당", 마지막 수정 2026년 10월 16일 14:59. https://missamap.com/ko/kr/daegu-gasil-catholic-church/wik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