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화 성당

목차
  1. 개요
  2. 역사
  3. 건축과 공간
  4. 관련 장소와 인물
  5. 참고자료 및 출처

개요

대화성당은 강원특별자치도 평창군 대화면에 있는 천주교 원주교구 소속 성당이다. 1931년 5월 대화 공소가 분리·독립해 본당으로 설립되었고, 1965년 성당이 평창으로 옮겨 가면서 공소로 있다가 1993년 본당으로 재설립되었다. 주보는 성녀 소화 데레사이며, 1996년 공사를 시작해 1998년 완공한 현재의 성당 내부 장식에는 도예가·화가·조각가 3명이 참여했다.

역사

〔공소 시대〕 한국가톨릭대사전에 따르면 1866년 병인박해 때 수원 지방에서 피난 온 몇몇 신자 가족들이 평창에 모여 살게 되었다. 1890년대에 평창군의 서내, 향교리, 하일, 산너머, 대화, 고인돌(일명 괴돌이), 물푸레 등이 풍수원 본당 관할 공소로 설립되었다. 뮈텔 주교는 조선 대목구장으로 서임되기 전인 1882년 이 지역을 순방한 바 있고, 교구장이 된 뒤인 1900년 11월 14~23일 원주 용소막 본당을 거쳐 평창군의 공소들을 사목 방문했다. 이 공소들은 1912년에 원주 본당, 1921년에 강릉 본당, 1923년에 주문진 본당의 관할 공소가 되었다.

〔본당 설립〕 대사전에 따르면 1929년 윤예원 신부가 평창군 대화면 대화리에 부임한 뒤 1931년 5월에 대화 공소가 분리·독립되어 본당으로 설립되었고, 나머지 공소들은 대화 본당의 관할이 되었다. 굿뉴스 자료실의 「춘천교구 전사(1791-1939)」 연표도 1931년 5월 평창 대화 본당 설립(주보: 예수의 아기 소화 데레사, 원주교구)을 적는다. 윤예원 신부는 처음 얼마간 대화 신리에서 사목하다가 상대화리에 한옥을 개조해 성당으로 썼으나 화재로 소실되었고, 1933년 하대화리에 있던 옛 공립 보통학교 관사를 사들여 성당으로 사용했다.

〔전쟁 이후와 평창 이전〕 대사전에 따르면 대화 본당은 6·25 한국전쟁으로 성당이 파괴되고 신자들이 흩어져 사목이 중단되었다. 1954년 조응환 신부가 부임해 복구 사업을 하면서 신자 수가 다시 늘었다. 1964년 12월 29일 조응환 신부는 당시 춘천교구장 대리 스튜어드(T. Stewart, 박 토마스) 신부의 승낙을 받아 평창읍 중리 355-5번지의 세무서 자리 762평을 매입했고, 이듬해 10월 머라이(B. Murray, 함) 신부가 평창으로 부임하면서 성당을 대화에서 평창으로 옮겨 대화 본당은 평창 본당의 관할 공소가 되었다. 1969년 5월 1일 평창군은 춘천교구에서 원주교구로 소속이 바뀌었다.

〔재설립〕 대사전에 따르면 1973년 3월 27일 현 소재지의 부지 338평을 매입해 블록 슬레이트 지붕에 건평 61평의 본건물과 부속 건물을 신축했다. 오랫동안 평창 본당 관할 공소로 있던 대화 공소는 1993년 본당으로 재설립되었다. 원주교구가 지역 사회의 변화로 본당 역할 수행이 어려워진 영월 상동 본당을 폐쇄해 관할 구역을 황지 본당에 편입시키고, 그 대신 새로 본당을 신설하기로 결정하면서 평창 본당에서 대화 공소가 독립·분리되어 본당으로 재설립된 것이다. 사제관이 없어 아파트를 전세 내어 쓰고 있었고, 사제관과 교육관, 성당을 신축하기 위해 노력하고 있었다. 평신도 단체로는 2개의 레지오 마리애와 성우회, 성모회, 하상회 등이 있었다.

〔교세와 역대 주임〕 대사전이 적은 교세는 1937년 437명, 1964년 900명, 1993년 367명이다. 관할 구역은 대화면과 방림면이었다. 역대 신부는 초대 윤예원 토마스(1929~1953), 2대 백응복 스테파노(1953~1954), 3대 조응환 타데오(1954~1964), 4대 유영구 베드로(1993. 3~)이다.

〔현 성당의 건립 과정〕 경향신문 2002년 4월 21일자 기사에 따르면 대화성당은 1931년 설립된 뒤 이농 등으로 신자가 줄어 공소가 되었다가 1993년 다시 본당으로 승격되었고, 예전에 쓰던 성당 건물은 블록으로 지어져 여름에는 비가 새고 난방이 되지 않아 겨울에는 미사를 보기도 어려웠다. 150여 명의 신자가 15년 가까이 성당을 짓기 위해 기금을 모았으나 일주일에 모이는 헌금 10여만 원으로는 여름 한철 수리비도 감당하기 어려웠다. 1996년 부임한 황인찬 신부가 서울의 성당을 돌며 도움을 호소했고, 나이 든 신자들은 산나물, 꿀, 메주, 계란 등을 팔아 건축비에 보탰으며, 타지의 신자와 비신자도 건축기금을 보탰다. 작가들은 재료비만 받고 작업에 참여했다. 이 기사는 도움에 보답하려는 뜻에서 대화성당이 종교와 관계없이 찾아오는 이들이 묵을 수 있도록 ‘작은 꽃 피정의 집’을 개방하고 있다고 전한다. 부산일보 2006년 5월 18일자 기사에서 본당 신자는 본당이 평창군청 소재지로 옮겨 가는 바람에 대화성당이 한동안 공소로 남아 있다가 1993년에 본당으로 승격되었으며, 신자들이 산나물을 뜯어 신축 기금을 마련하는 가운데 외지의 성금이 모였다고 회상한다.

건축과 공간

경향신문(2002)은 대화성당이 1996년 공사를 시작해 1998년 완공되었으며, 도예가와 조각가, 화가 3명이 성당 내부를 꾸미는 데 참여했다고 전한다. 부산일보(2006)도 성미술품 제작을 도예가 변승훈, 화가 김남용, 조각가 한진섭 세 사람이 주도했다고 적고, 지금의 모습이 갖추어진 것은 1998년이라고 적는다.

〔외관과 배치〕 경향신문은 이 성당이 뾰족한 첨탑과 거대한 종탑 없이 땅 위에 낮게 엎드린 벽돌 건물이며, 동글동글한 십자가를 연속해 배치한 출입문을 가졌다고 설명한다. 부산일보에 따르면 길가의 장승 또는 솟대를 연상시키는 노란색 청동판 간판은 조각가 서보원이 만들었고, 어른 가슴 높이의 붉은 벽돌담과 담보다 낮은 흰색 철제 대문(조각가 최태훈 작품)이 있다. 대문 앞에서 보면 왼쪽부터 사무실, ‘작은 꽃 피정의 집’, 사제관, 성당 순으로 건물이 놓여 있으며, 마당을 합친 전체 규모는 300평 정도라고 한다.

〔도자기 벽〕 두 기사는 도예가 변승훈이 분청사기 판을 구운 뒤 조각내 벽에 붙여 내부 벽을 만들었다고 설명한다. 판의 수는 경향신문이 2,200여 장, 부산일보가 7톤의 흙으로 구운 2천300장으로 서로 다르게 적는다. 경향신문에 따르면 구상과 밑그림, 도자기 조각 붙이기에 1년이 걸렸고 변승훈의 제자와 신자들이 3개월 넘게 함께 작업했으며, 나이 든 신자들은 아랫부분의 타일을, 젊은이들은 윗부분을 맡았다. 예배당 뒷부분 모자이크 벽화의 주제는 ‘골고다(골고타) 언덕의 세 십자가’로, 가운데 큰 십자가는 예수를, 좌우의 십자가는 함께 처형된 죄수 2명을 상징한다. 부산일보는 뒷벽에는 여러 색이 섞여 있지만 정면 벽은 신자들의 집중도를 높이기 위해 흰색뿐이라고 적는다. 경향신문은 성당 분위기의 위압감을 줄이려고 제단의 높이를 신자 좌석의 눈높이에 맞춰 낮게 설치했다고 전한다.

〔제대와 성물〕 조각가 한진섭이 제작해 봉헌한 십자고상, 제대, 독경대, 감실이 제단에 놓여 있다. 이 성물의 재질을 경향신문은 자줏빛 대리석, 부산일보는 붉은색 화강석으로 다르게 적는다. 부산일보에 따르면 십자고상은 제대 중앙이 아니라 약간 오른쪽에 놓였고, 검은색 화강석으로 만든 십자가의 길(14처)의 예수상에는 이목구비가 없다. 경향신문은 14처가 스테인드글라스 사이사이에 걸려 있다고 적는다. 성수대는 경향신문이 화강암 재질, 부산일보가 현관에서 마주치는 하얀 대리석 성수대라고 적는다. 성당 외부의 성모상도 한진섭의 작품으로 얼굴을 원형으로 깎아 만들었고, 경향신문에 따르면 신자들 사이에서 ‘100m 미인’으로 불린다. 지붕 위의 청동 십자가는 작은 십자가 4개가 연결된 형태로 무게가 600kg이 넘으며 4복음서를 쓴 마태오, 마르코, 루가, 요한을 상징한다(경향신문).

〔유리화〕 경향신문은 서양화가 김남용이 참여한 스테인드글라스가 도벽과 어울리도록 낮은 채도의 갈색·청색·녹색을 쓰고 다각형과 곡선으로 꾸며졌다고 적는다. 부산일보는 이 유리화의 이름이 ‘온 누리에 가득한 성령’이며 연한 하늘색과 연한 녹색의 다각형이 들어 있다고 적는다.

관련 장소와 인물

  • 풍수원 본당: 1890년대 대화를 비롯한 평창군 공소들이 처음 관할 공소로 속했던 본당이다(한국가톨릭대사전).
  • 평창 본당: 1965년 성당이 평창읍으로 옮겨 가면서 대화 본당이 관할 공소가 된 본당이며, 1993년 대화 공소가 여기서 독립해 본당으로 재설립되었다(한국가톨릭대사전).
  • 영월 상동 본당: 1993년 원주교구가 폐쇄하고 관할 구역을 황지 본당에 편입시킨 본당으로, 그 대신 대화 본당이 재설립되었다(한국가톨릭대사전).
  • 작은 꽃 피정의 집: 대화성당이 종교와 관계없이 찾아오는 이들에게 개방한 숙소이다(경향신문, 부산일보).

참고자료 및 출처

  1. 한국교회사연구소, 한국가톨릭대사전 “대화 본당”. 공소 시대, 1931년 본당 설립과 폐쇄, 1993년 재설립, 교세와 역대 신부.
    https://encyclopedia.catholic.or.kr/entry/1329
  2. 굿뉴스 자료실, 「기록으로 보는 춘천교구 80년 63: 춘천교구 전사(1791-1939)」. 1931년 5월 평창 대화 본당 설립(주보: 예수의 아기 소화 데레사, 원주교구) 연표.
    https://home.catholic.or.kr/pdsm/bbs_view.asp?Page=36&id=178677&menu=4817&num=705
  3. 경향신문, 「‘낮은 삶 보듬으려 고요히 엎드렸구나’ 평창 대화성당」(2002년 4월 21일 입력). 1996~1998년 건립, 건립 기금 마련 과정, 내부 장식과 성물.
    https://www.khan.co.kr/article/200204211624551
  4. 부산일보, 「[내영혼의 쉼터] ③ 아름다운 성당 강원도 대화성당」(2006년 5월 18일 입력). 성미술품 제작자와 작품, 외관과 배치, 본당 승격 과정.
    https://www.busan.com/view/busan/view.php?code=2006051800014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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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6년 10월 17일 00:4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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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6년 10월 17일 00:4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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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 가톨릭 장소백과, "대화 성당", 마지막 수정 2026년 10월 17일 00:47. https://missamap.com/ko/kr/wonju-daehwa-catholic-church/wik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