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양 성당

목차
  1. 개요
  2. 역사
  3. 관련 장소와 인물
  4. 참고자료 및 출처

개요

남양성당은 경기도 화성시 남양읍에 있는 천주교 수원교구 제1대리구 화성지구 소속 성당이다. 1961년 10월 8일 왕림 본당에서 분리되어 남양 공소에서 본당으로 승격되었으며, 주보는 노동자 성 요셉이다. 이후 사강(1975), 비봉(2001), 마도(2011), 신남(2019) 성당을 분리시켰다.

역사

〔공소 시대〕 한국가톨릭대사전에 따르면 남양 지역 천주교회의 뿌리는 1888년 왕림(갓등이) 본당이 설정되기 전후에 세워진 백학(쌍학리) 공소와 활초리(싸리 뿌리) 공소이다. 이후 남양리와 안석리도 1920년대 초 서울교구 공소 일람표에 나타나, 이 지역 공소는 백학과 활초리를 포함해 모두 4개가 되었다. 이 가운데 남양 본당의 모체가 되는 남양 공소는 1952년 남양 사람 임춘례(미카엘)가 백학 공소 회장 이정의(베드로)의 권유로 입교한 뒤 남양 공소의 회장을 맡으면서 활기를 찾았다. 초기에는 7세대 가량의 신자들이 임춘례의 집에 모여 공소 예절을 했다. 디지털화성시문화대전은 남양성당이 1957년 당시 신자들이 공동으로 한옥 기와집을 사서 공소로 삼은 데서 시작했다고 적는다.

〔본당 승격〕 대사전에 따르면 1955년부터 남양 신자들이 중심이 되어 성당 신축 기성회를 조직하고 강당 건물을 사는 등 본당 승격을 위한 움직임이 활발해졌고, 남양 공소는 1961년 10월 8일 왕림 본당에서 분리되어 본당으로 승격되었다. 초대 주임으로 양병묵(루카) 신부가 부임했다(역대 신부 표에는 1962년 1월 부임으로 기재). 문화대전도 1961년 10월 8일 왕림성당에서 분리되어 남양공소에서 남양성당으로 승격되었고 설립 당시 신자 수는 40여 명이었다고 적으며, 1963년 10월 7일 천주교 수원교구가 설정되면서 서울대교구에서 수원교구로 편입되었다고 기록한다.

양병묵 신부는 신자를 포함한 지역 주민의 소득 증대를 위해 회장들과 상의해, 남양이 공소이던 시절 왕림 본당 임세빈(요셉) 신부가 시작한 개간 사업을 이어 여러 곳에 수백 정보의 염전과 논을 일구며 본당 발전의 기틀을 다졌다(대사전).

〔성당 신축과 시설 확충〕 대사전에 따르면 공소 시대부터 쓰던 40평 기와집 성당이 늘어난 신자를 수용하지 못하자 남양 본당은 1965년 기존 성당에서 약 150m 떨어진 곳에 부지를 사들였고, 이듬해 11월 신자들과 인근 미군 미사일 부대의 장비 지원으로 성당을 완공했다. 문화대전은 1966년 4월부터 새 성당 건축을 시작해 11월에 완공했으며, 1970년 4월 신자 1,000여 명이 참석한 가운데 당시 수원교구장 윤공희(빅토리노) 주교의 집전으로 ‘신축성당 및 사제관 낙성식’을 거행했다고 적는다. 문화대전에 따르면 신자들의 교회 활동을 장려하고자 ‘가톨릭회관’을 지어 1972년 8월 15일 축성식을 가졌고, 대사전은 1972년 8월 당시 도시 본당에서도 보기 드문 교육관을 건립했다고 적는다.

1975년 10월 사강 본당을 분당시킨 남양 본당은 신자 수가 급증할 것으로 예상해 1982년 4월 마도면에 염전 1,000여 평을 사들였고, 이에 앞서 1980년 8월 이윤덕이 기증한 임야 1,000평으로 분당을 대비했다(대사전). 1988년 5월에는 수녀원 건물과 함께 기존 교육관을 지하 1층, 지상 1층으로 증축했고(대사전은 5월, 문화대전은 5월 3일 수녀원과 교육관 축성식), 이듬해 2월부터는 한국 순교 복자 수녀회 분원이 설치되었다(대사전). 1992년 11월 29일 성당 건물 보수 및 증축 공사를 마무리했고, 1993년에는 남양 본당과 남양 성지가 공동으로 소말리아 돕기 성금을 모금했다(대사전).

〔남양성지와 분가〕 문화대전에 따르면 1983년 남양 순교자 순교터 발굴을 시작했고, 1984년부터 남양성지 개발을 시작했다. 이후 2001년 1월 30일 비봉성당, 2011년 8월 30일 마도성당, 2019년 6월 18일 신남성당을 분리시켰다. 2010년 3월 12일에는 ‘남양 요셉노인대학’을 설립해 개강미사를 봉헌했고, 2011년 10월 9일에는 설립 50주년 경축미사를 수원교구장 이용훈(마티아) 주교의 집전으로 봉헌했다.

〔공소와 사목〕 대사전에 따르면 1995년 3월 현재 신남, 활초, 안석, 장덕, 두곡, 석교, 수루지, 시리, 검다지, 양노, 구포리, 배꼬지, 유포, 쌍학, 백학, 무송, 송정 1, 송정 2, 원천 등 19개 공소가 있었고 이 중 8개 공소는 자체 공소 건물이 있었다. 남양 본당 전체 신자의 3분의 2가 공소 신자였기 때문에 공소 지역에 대한 사목적 배려와 선교가 본당 사목의 주요 부분이었다. 대부분의 공소가 본당 소재지에서 멀고 교통이 불편해 각 공소 회장을 사목 협의회 당연직 회원으로 하고, 전 교우의 레지오 단원화 운동을 펴 공소마다 쁘레시디움을 하나 이상 두었으며, 본당 신부들은 매년 2회 정도 공소를 방문해 미사와 성사를 집행했다.

〔관할 구역과 현황〕 대사전은 설립 당시 관할 구역을 남양면 전 지역, 비봉면 쌍학리·백학리·구포리·양노리·검다지·배꼬지·유포리, 마도면 두곡리·송정1·2리·석교리·쌍송 1~3리·청원2리로 적고, 교세는 1964년 1,295명, 1974년 2,325명, 1980년 1,226명, 1988년 2,212명, 1993년 2,754명이라고 적는다. 문화대전에 따르면 성당은 화성시 남양읍 신외리, 장전리, 수화리, 문호리, 시리, 원천리, 송림리, 북양리, 남양리 일부를 관할하며, 2020년 기준 830세대 1,949명, 사제 1명과 수녀 2명이 있고 파견 수녀회는 한국 순교 복자 수녀회이다. 성당 규모는 대지 3,266㎡, 건물 1,695.1㎡이고 소속 단체로는 레지오 마리애, 꾸르실료, 체나콜로, 성가대, 기사사도회, 성모회, 성령기도회, 연령회, 매리지 엔카운터(ME) 등이 있다.

〔역대 주임 신부〕 한국가톨릭대사전이 적은 역대 신부는 초대 양병묵 루카(1962.1~1970.6), 2대 봉준석 마우리시오(1970.6~1975.3), 3대 박지환 요한(1975.3~1985.3), 4대 방효익 바오로(1985.3~1986.1), 5대 최덕기 바오로(1986.1~1989.8), 6대 이상각 프란치스코 사베리오(1989.8~1995.2), 7대 나모스키(J. Najmowski, 나현철) 야고보(1995.2~)이다.

관련 장소와 인물

  • 왕림(갓등이) 본당: 남양 공소가 1961년 분리되어 본당으로 승격될 때 속해 있던 본당이다(대사전, 문화대전).
  • 사강성당(1975)·비봉성당(2001)·마도성당(2011)·신남성당(2019): 남양성당에서 분리된 성당이다(문화대전).
  • 남양성지: 남양 순교자 순교터 발굴(1983)과 성지 개발(1984)이 문화대전에 기록되어 있다.
  • 양병묵(루카) 신부: 남양 본당의 초대 주임이며 사강 본당의 초대 주임도 맡았다(대사전).

참고자료 및 출처

  1. 한국교회사연구소, 한국가톨릭대사전 “남양 본당”. 공소 시대, 1961년 본당 승격, 성당 신축, 공소 현황, 교세와 역대 신부.
    https://encyclopedia.catholic.or.kr/entry/1043
  2. 한국학중앙연구원, 디지털화성시문화대전 “남양성당”(집필 정종득). 설립과 변천, 낙성식, 분가, 현황.
    https://hwaseong.grandculture.net/hwaseong/toc/GC0860093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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만들어진 날
2026년 10월 16일 23:5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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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6년 10월 16일 23:5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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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용
한국 가톨릭 장소백과, "남양 성당", 마지막 수정 2026년 10월 16일 23:51. https://missamap.com/ko/kr/suwon-namyang-catholic-church/wik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