죽산성지

목차
  1. 개요
  2. 역사
  3. 건축과 공간
  4. 관련 장소와 인물
  5. 참고자료 및 출처

개요

죽산순교성지는 경기도 안성시 일죽면 죽림리에 있는 천주교 수원교구의 순교성지로, 병인박해(1866) 때 죽산 도호부로 끌려와 처형된 신자들의 순교터 ‘잊은 터’에 조성되었다. 순교자 묘역에는 복자 박경진 프란치스코와 오 마르가리타 부부, 하느님의 종 8명을 포함한 24위 순교자의 묘와 무명 순교자 묘가 있다.

역사

〔죽산 도호부〕 주교회의 시복시성주교특별위원회는 죽산이 고려 시대 이래 충청·전라·경상 삼남으로 내려가는 주요 교통 요지였다고 적는다. 조선 초기에는 죽산현이었으나 군사적 중요성이 커져 임진왜란 직후 죽산도호부(죽산부)로 승격되었고, 인조 때 여주의 수어후영을 죽산으로 옮기면서 도호부사가 수어후영장과 토포사를 겸하게 되었다. 가톨릭신문은 죽산이 1595년 도호부로 승격되었다고 전한다.

〔병인박해와 죽산의 순교자〕 병인박해 당시 죽산 도호부사는 토포사와 영장을 겸임하고 있어 군사력을 바탕으로 인근 여주·이천·용인·안성의 포졸까지 동원해 다른 지역보다 많은 신자를 체포했다고 위원회는 설명한다. 작은 고을인 죽산에서 22명이 순교했으며 이들에 대한 기록은 『치명일기』, 『병인치명사적』, 『박순집 증언록』 등에서 찾을 수 있다. 처형은 1866년에서 1869년 사이에 집중되었고, 한날 한 장소에서 한 가족이 처형된 경우가 여러 번 있었다. 성지 안내와 안성시 관광 안내는 『치명일기』와 『증언록』에 이름이 밝혀진 순교자를 25명으로 적고, 가톨릭신문과 위원회 자료는 순교자 묘를 24기(위)로 적으며, 그 가운데 복자 박경진·오 마르가리타 부부와 하느님의 종 8위가 포함된다.

〔잊은 터〕 안성시 관광 안내와 옛 성지 홈페이지는 처형 장소 ‘잊은 터’의 원래 이름이 이진(夷陳) 터이며, 고려 때 몽고군이 죽주산성을 공략하기 위해 진을 쳤던 자리여서 오랑캐가 진을 쳤다는 뜻으로 그렇게 불렸다고 설명한다. 병인박해 때 “거기로 끌려가면 죽은 사람이니 잊으라”고 하여 ‘잊은 터’로 불리게 되었다. 목장이 되기 전에는 노송이 우거지고 길에서 사람이 보이지 않는 후미진 골짜기였다고 전한다. 가톨릭신문은 처형장이 삼남에서 서울로 향하는 큰길가에 있어 행인의 왕래가 잦았고 누구나 처형 장면을 볼 수 있었다고 쓴다. 옛 성지 홈페이지는 성지 주변에 삼죽면 덕산리의 ‘두둘기’ 마을이 있다고 소개한다.

〔가족 순교〕 위원회 자료에 따르면 한 가족을 같은 날 처형하는 것은 조선 국법으로 금지되어 있었으나 병인박해 때는 지켜지지 않았다. 복자 박경진 프란치스코(1835-1868)와 오 마르가리타 부부는 진천 절골로 이주해 2년가량 신앙생활을 하다가 1868년 9월 5일 죽산 포졸에게 체포되었고 1868년 9월 28일(음력 8월 13일) 함께 순교했다. 조치명 타대오(1839-1868)와 김 우르시치나(1842-1868) 부부는 1868년 7월(음력) 체포되어 죽산 관아 옥에서 교수형으로 순교했고, 열 살 아들이 밥을 구걸해 옥바라지를 했다. 최제근 안드레아(1848-1868)와 방 데레사(1849-1868) 부부는 1868년 음력 7월 죽산 관아에서 교수형으로 순교했으며, 당시 최제근은 20세였다. 여기중(1806?-1866)과 아들 여정문의 가족은 죽산 관아에서 교수형으로 순교했고, 가톨릭신문은 여정문(1867년 순교)이 아내와 15세 아들과, 최성첨(1868년 순교)이 아들과 한날한자리에서 순교했다고 전한다.

〔그 밖의 순교자〕 위원회 자료에 따르면 정덕구 야고보(1845-1867)는 1867년 12월 5일 공주 국실 점촌에서 죽산 포교에게 체포되어 12월 25일경 죽산 관아 옥에서 22세로 순교했다. 문 막달레나(1848-1866)는 시아버지 고시수 야고보와 함께 죽산 포교에게 체포되어 죽산에서 교수형으로 순교했고, 유 베드로(1846-1869)는 평창에서 체포되어 죽산 관아로 압송되었다. 고시수 야고보(1817-1866)처럼 죽산 포교에게 체포되었으나 수원에서 순교한 경우도 있다. 안성시 관광 안내는 신자들이 숨어 살던 산속에서 마을 사람 10여 명이 김 도미니코의 17세 딸을 내놓으라고 협박한 일이 전해 온다고 적는다.

〔성지 조성〕 가톨릭신문에 따르면 1979년 죽산본당이 ‘죽산성지 조성 추진위원회’를 발족해 ‘잊은 터’를 성지로 가꾸기 시작했다. 순교터 위치를 확인하고 사료를 수집한 본당은 1994년부터 2만여 평의 부지를 확보했고, 1997년 6월 성당 신축 공사를 시작해 같은 해 12월 14일 봉헌식을 거행했다. 안성시 관광 안내는 병인박해가 시작된 1866년부터 이곳에 공소가 설립되기 2년 전인 1932년까지 70여 년 동안 신자 공동체가 형성되지 않았다고 적는다.

건축과 공간

가톨릭신문은 성지 초입의 ‘죽산성지’ 큰 돌에서 성지까지 800여 미터이며 주차장 중앙에 예수성심상이 있고 ‘성역(聖域)’ 현판이 걸린 대문이 있다고 적는다. 위원회 자료에 따르면 성지 중앙에는 무명 순교자 묘를 중심으로 양쪽에 순교자 현양탑과 병인박해 순교자 묘 24기가 좌우 12기씩 놓여 있고, 이름이 전하는 24명 외 100여 명의 순교자는 이름조차 알 수 없다. 가톨릭신문은 순교자 묘역을 감싸는 모양으로 십자가의 길 14처가 들어서 있고 성모신심의 길이 있다고 전한다.

관련 장소와 인물

  • 복자 박경진 프란치스코와 오 마르가리타: 진천 절골에서 체포되어 1868년 죽산에서 함께 순교한 부부이다(주교회의).
  • 하느님의 종 조치명 타대오와 김 우르시치나, 최제근 안드레아와 방 데레사: 죽산에서 순교한 부부들이다(주교회의).
  • 여기중과 여정문 일가: 죽산 관아에서 가족이 함께 순교했다(주교회의, 가톨릭신문).
  • 죽주산성: 고려 때 몽고군이 공략하려 했던 산성으로 ‘이진 터’ 이름의 유래이다(안성시, 옛 성지 홈페이지).
  • 삼죽면 덕산리 ‘두둘기’: 성지 주변의 마을로, 박해 때 신자들의 사연이 서린 곳으로 소개된다(옛 성지 홈페이지, 가톨릭신문).

참고자료 및 출처

  1. 한국천주교주교회의 시복시성주교특별위원회, “관련 성지: 죽산 성지”. 죽산 도호부, 병인박해 순교자 22명, 순교자별 약전, 성지 묘역 구성.
    https://cbck.or.kr/koreanmartyrs/Shrines/33
  2. 가톨릭신문, “[수원교구 성당 순례] 죽산순교성지 성당”(2025년 11월 7일). 도호부 승격, 처형장의 위치, 가족 순교, 1979~1997년 성지 조성과 성당 봉헌.
    https://www.catholictimes.org/article/20251107500139
  3. 가톨릭신문, “[순례, 걷고 기도하고] 수원교구 죽산순교성지”(2024년 5월 12일). 이진터와 잊은 터 명칭, 순교자 묘역 구성, 두둘기.
    https://www.catholictimes.org/article/20240512500053
  4. 안성시 문화관광, “죽산순교성지”. 순교자 25명, 이진 터의 유래, 1932년 공소 설립 이전의 상황.
    https://www.anseong.go.kr/tour/themeTourist/view.do?idx=203&mId=0104000000
  5. 천주교 죽산순교성지(옛 홈페이지), “성지이야기”. 순교자 25명, 이진터와 잊은 터, 두둘기.
    https://org.catholic.or.kr/juksan/story_01.ht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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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6년 10월 15일 04:4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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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 가톨릭 장소백과, "죽산성지", 마지막 수정 2026년 10월 15일 04:44. https://missamap.com/ko/kr/suwon-juksan-shrine/wik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