은이·골배마실성지

목차
  1. 개요
  2. 역사
  3. 건축과 공간
  4. 신앙적 의미와 방문 맥락
  5. 관련 장소와 인물
  6. 참고자료 및 출처

개요

은이·골배마실 성지는 경기도 용인시 처인구 양지면 남곡리 일대에 있는 천주교 수원교구 소속 성지이다. 박해시대 교우촌이던 은이(隱里)와 그 윗마을 골배마실은 한국인 최초의 사제 성 김대건 안드레아가 어린 시절을 보내고 세례를 받아 신학생으로 선발된 곳이며, 사제 서품 후 첫 사목을 한 곳이기도 하다. 교구 주소록은 두 곳을 '은이·골배마실 성지'로 함께 표기하지만 가톨릭신문은 두 장소가 서로 다른 곳이라고 설명하며, 가까운 거리에 있고 모두 김대건 성인의 유년 시절과 관련되어 함께 관리한다고 전한다.

역사

한국천주교주교회의 시복시성주교특별위원회는 '은이'가 글자 그대로 숨어 있는 마을이라는 뜻이며, 박해를 피해 모여 살면서 교우촌이 형성되었다고 설명한다. 인근에는 김대건 신부가 자란 골배마실 교우촌이 있었고, 문수봉 너머 남서쪽에는 한덕골 교우촌(현 용인군 이동면 묵리)과 미리내 교우촌(현 안성군 양성면 미산리)이 있었다. 은이 교우촌이 언제 형성되었는지는 정확히 알 수 없으나, 1846년 순교한 성 한이형 라우렌시오가 21세 때(1819년) 혼인한 뒤 곧바로 은이 마을로 이주해 은이 교우촌의 회장을 지냈다는 기록이 있다.

주교회의 자료에 따르면 김대건 신부의 집안은 1820년대 후반 무렵 솔뫼를 떠나 한양의 청파와 용인 한덕골에 잠시 거주하다가 은이의 윗마을인 골배마실로 이주한 것으로 기록되어 있다. '골배마실'은 첩첩산중이고 뱀과 전갈이 많아 '배마실(뱀마을)'이라 불리던 동네에서 유래했으며, 소년 김대건의 가족이 살던 집이 배마실로 이어지는 골짜기 안에 있어 골배마실이라 했다. 김대건 신부의 부친 김제준 이냐시오는 정하상 바오로와 왕래하며 신앙생활을 하다 1836년 프랑스 선교사 모방 신부가 입국한 사실을 알고 한양으로 올라가 모방 신부에게 세례를 받았다. 모방 신부는 교우촌을 순방하던 중 김제준의 장남 김대건을 신학생으로 선발하기 위해 골배마실을 찾았고, 이때 모방 신부가 머물며 신자들에게 성사를 준 곳이 은이 마을이었다고 하며, 이로써 은이 교우촌이 공소로 설정되었다.

굿뉴스 성지 안내는 1836년 15세의 소년 김대건이 이곳에서 모방 신부로부터 세례를 받고 최양업, 최방제와 함께 신학생으로 선택되어 마카오로 파견되었다고 기록한다. 1839년 기해박해 때 새남터에서 순교한 모방 신부의 사목 활동 중심지도 은이 공소였다고 한다. 가톨릭신문(2024년)은 1836년 4월 은이와 가까운 골배마실에 살던 15세 소년 김대건이 이 자리에서 모방 신부에게 세례를 받고 첫 영성체를 했다고 전하며, 은이공소 터는 교우촌 후손들의 증언으로 찾았다고 소개한다. 한편 헤리티지위키(dh.aks.ac.kr)는 김대건이 1837년 마카오로 떠나 신학교에서 공부했다고 적고 있어 출처에 따라 연도가 다르다.

은이와 골배마실 교우촌도 박해를 겪었다. 1839년 기해박해로 김제준 이냐시오(1796-1839)가 골배마실에서 체포되어 한양으로 압송되어 순교했고, 1846년 병오박해 때에는 공소 회장 한이형 라우렌시오(1798-1846)가 체포되어 포도청 옥에서 교수형으로 순교했다.

김대건은 신학 과정을 마친 뒤 부제품을 받았고, 1845년 8월 중국 상하이 김가항 성당에서 페레올 주교로부터 사제 서품을 받았다. 주교회의 자료는 귀국 후 한양에서 사목하다 1846년 부활 때까지 은이 공소에 머물며 인근 교우촌을 순방했고, 은이 공소가 김대건 신부의 사목 중심지, 곧 본당 역할을 했다고 설명한다. 용인의 터골(현 용인군 이동면 서리), 이천의 단내(현 이천군 호법면 단천리)까지 순방했다고 전한다. 헤리티지위키는 김대건 신부가 은이공소에 도착한 1845년 11월부터 선교사 입국로 개척을 위해 다시 떠난 1846년 5월까지 은이를 중심으로 서울과 용인 일대에서 사목했다고 적는다. 가톨릭신문(2024년)은 1845년 10월 조선 땅을 밟은 김대건 신부가 1846년 4월까지 이곳을 중심으로 사목했고, 은석골, 사리틔, 검은정이, 먹뱅이, 미리내, 삼막골, 고초골, 용바위, 단내, 한양 등을 찾아 교우들에게 성사를 베풀었다고 전한다. 같은 기사는 은이를 사제품을 받고 귀국한 김대건 신부의 처음이자 유일한 사목 장소라고 소개한다. 가톨릭신문은 골배마실이 사제 서품 후 귀국한 김대건 신부가 모친 고 우르슬라와 함께 머물며 몇 달 동안 사목한 곳이라고도 전한다.

성지 개발은 골배마실에서 먼저 시작되었다. 가톨릭신문(2018년)에 따르면 골배마실은 양지본당 신자들 사이에서 김대건 신부가 살던 집터로 구전되어 왔고, 이곳에서 돌절구, 맷돌, 우물터, 구들장 등 신앙 선조들이 사용하던 물건이 발견되었다. 1962년부터 본당 차원에서 교회 사적지로 가꾸려는 노력이 있었고, 교구 설정 이후 교구 차원의 성지 개발로 이어졌다(가톨릭신문 2024년 기사는 1961년 성지로 조성되었다고 적는다). 수원교구는 1967년 10월 1일 순교자 현양대회를 미리내성지가 아닌 골배마실에서 열었고, 양지성당에서 골배마실까지 걸어서 행렬한 뒤 미사를 봉헌했다. 이듬해인 1968년에도 신자 4,500여 명이 참례한 가운데 현양대회를 거행했으며, 초대 교구장 윤공희 주교가 미사를 주례했다. 골배마실은 1960~1970년대 미리내와 함께 김대건 신부 현양운동의 구심점 역할을 했고, 이는 은이성지를 개발하는 계기가 되었다. 현재의 정돈된 골배마실의 모습은 1997년 단장한 것이며 김대건 신부 청동상도 그때 세워졌다고 한다. 이전의 성상은 양지성당 마당에 놓여 있다.

굿뉴스에 따르면 은이 공소의 교회사적 중요성을 인식한 양지 성당은 1996년 방치되었던 은이 공소터 일부를 매입하고 야외제대와 성 김대건 신부상을 세우며 성지 개발을 시작했다. 성 김대건 신부 순교 150주년을 맞아 시작된 '성 김대건 신부 기념관 건립 추진' 운동에 이어 2002년과 2003년에 주변 땅을 추가 매입하고 사제관과 성당, 숙소 건물 등을 마련했으며, 성지 전담신부가 발령되어 본격적인 개발이 시작되었다. 2013년에는 김대건 신부가 세례를 받은 곳으로 추정되는 은이 공소터 부지를 추가 매입했고, 2015년 8월 김가항 성당 복원과 김대건 신부 기념관 기공미사를 봉헌했다. 2016년 9월 김대건 신부 순교 170주년을 맞아 새 성당 봉헌식과 바로 옆에 신축한 김대건 기념관 축복식이 거행되었다. 이로써 은이 성지는 김대건 신부의 탄생과 성장, 세례성사와 신학생 선발, 사제 수품, 사목 활동, 순교에 이르는 생애 전반을 기억할 수 있는 성지가 되었다.

건축과 공간

은이성지의 성당은 김대건 신부가 사제 서품을 받은 상하이 김가항(金家巷, 진지아샹) 성당을 복원한 건축물이다. 헤리티지위키에 따르면 원래의 김가항 성당은 17세기 중반 상하이 김가항에 민가 건축을 개조해 만든 성당으로 1841년에는 남경교구의 중심이었으나, 2001년 상하이 정부의 도시 개발 계획에 따라 철거되었다. 수원교구는 철거 직전 성당을 실측하고 기둥과 대들보 등 일부 부재를 가져와 2016년 은이에 복원했다. 가톨릭신문(2024년)에 따르면 제대 근처의 기둥 4개와 대들보 2개, 동자기둥 1개는 철거 당시 성당의 것을 그대로 사용했고, 외벽은 흰색이다.

김가항성당 곁의 김대건 기념관에는 성인의 탄생과 성장, 서품, 입국, 사목, 순교에 이르는 장면과 관련 유물이 전시되어 있다. 한국·중국·필리핀에 걸친 성인의 활동 여정과 김가항성당 복원 과정 자료, 은이공소와 인근 양지성당에서 사용한 유물, 오래된 교회서적도 있다. 1961년 골배마실성지 조성 당시 야외제대에 설치되었던 부조가 기념관에 전시되어 있으며, 소년 김대건이 살던 골배마실의 초가를 배경으로 절구질하는 모친 고 우르술라의 모습을 담고 있다. 성지 마당의 김대건 기념각은 1947년 성지 인근 벌터에 있던 남곡리성당(현 양지본당)의 기념경당을 복원·재현한 것으로, 내부 제대 위에는 옛 성당 종탑에 있던 김대건 성인상이 모셔져 있다. 골배마실에는 김대건 신부 청동상과 생가터임을 알리는 비석이 있다.

신앙적 의미와 방문 맥락

주교회의 자료는 은이를 김대건 신부의 사목 중심지로 소개하고, 가톨릭신문은 은이성지에서 신덕, 망덕, 애덕 고개를 넘어 미리내성지로 향하는 10.3km 길이 김대건 신부가 은이에서 사목할 때 거닐던 길이자 순교한 그의 유해가 거쳐 간 길이라고 설명한다. 이 길은 '청년 김대건 길'로 불리며 순례자들이 걷는다. 굿뉴스 안내는 은이~골배마실~은이를 잇는 3시간, 은이~미리내를 잇는 4시간 코스를 소개한다.

관련 장소와 인물

  • 미리내 성지: 김대건 신부의 시신이 안장되었던 안성의 성지로, 은이성지에서 도보순례길로 이어진다.
  • 한덕골: 김대건 신부 집안이 골배마실로 오기 전 잠시 거주한 것으로 주교회의 자료가 기록하는 용인의 교우촌이다.
  • 양지성당: 은이 공소부터 이어지는 공동체이며, 1996년 은이 공소터 일부를 매입하며 성지 개발을 시작했다.
  • 성 김대건 안드레아(1821-1846): 한국인 최초의 사제이자 순교자이다.
  • 김제준 이냐시오(1796-1839): 김대건 신부의 부친으로, 기해박해 때 골배마실에서 체포되어 순교했다.
  • 한이형 라우렌시오(1798-1846): 은이 공소의 회장으로, 병오박해 때 순교했다.
  • 모방 신부: 김대건을 신학생으로 선발한 파리외방전교회 선교사로, 1839년 기해박해 때 새남터에서 순교했다.

참고자료 및 출처

  1. 한국천주교주교회의 시복시성주교특별위원회, 관련 성지 은이(골배마실) 성지. 교우촌 형성, 골배마실 지명 유래, 김대건 신부 집안과 모방 신부, 기해·병오박해 순교, 은이 공소의 사목 중심 역할, 김가항성당 복원을 확인했다.
    https://cbck.or.kr/koreanmartyrs/Shrines/32
  2. 한국천주교주교회의 굿뉴스, 성지와사적지 은이·골배마실 성지. 1836년 세례와 신학생 선발, 1996년 이후 성지 개발 과정, 2016년 새 성당 봉헌, 도보 순례 코스를 확인했다.
    https://app.catholic.or.kr/web/holyplace/?seq=2315
  3. 가톨릭신문, 「[길에서 쓰는 수원교구사] 골배마실성지」(2018년 3월 20일). 골배마실의 역사와 1960~70년대 현양운동, 1997년 정비를 확인했다.
    https://www.catholictimes.org/article/201803200253854
  4. 가톨릭신문, 「[순례, 걷고 기도하고] 수원교구 은이·골배마실 성지」(2024년 1월). 은이 사목 활동, 김가항성당 부재, 기념관, 기념각, 청년 김대건 길을 확인했다.
    https://www.catholictimes.org/article/202401020229918
  5. 헤리티지위키(dh.aks.ac.kr), 은이성지 김가항 성당. 김가항 성당의 원래 모습, 철거와 복원 경위를 확인했다.
    https://dh.aks.ac.kr/~heritage/wiki/index.php/%EC%9D%80%EC%9D%B4%EC%84%B1%EC%A7%80_%EA%B9%80%EA%B0%80%ED%95%AD_%EC%84%B1%EB%8B%B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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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6년 10월 16일 07:5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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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6년 10월 16일 07:5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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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용
한국 가톨릭 장소백과, "은이·골배마실성지", 마지막 수정 2026년 10월 16일 07:53. https://missamap.com/ko/kr/suwon-euni-golbaemasil-shrine/wik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