배티 순교 성지

목차
  1. 개요
  2. 역사
  3. 건축과 공간
  4. 관련 장소와 인물
  5. 참고자료 및 출처

개요

배티성지는 충청북도 진천군 백곡면 양백리에 있는 천주교 청주교구의 성지로, 박해 시대 교우촌이 있던 곳이자 조선대목구 최초의 신학교가 설립되고 최양업 신부가 사목 중심지로 삼았던 곳이다. 배티성지 홈페이지는 이곳을 최양업 신부와 선교사들의 사목 중심지, 조선대목구 최초의 신학교, 복자 오반지 바오로와 무명 순교자들의 안식처, 박해 시대 비밀 교우촌이라는 네 가지로 소개하며, 성지 일대는 충청북도 기념물로 지정되어 있다.

역사

〔지명〕 배티는 ‘배나무 고개’라는 뜻으로, 충북 진천에서 경기도 안성으로 넘어가는 고개 주변에 돌배나무가 많아 붙은 이름이며 한자로는 이치(梨峙)라고 쓴다(배티성지). 디지털진천문화대전은 이 유래와 함께, 조선 영조 때 이인좌가 난을 일으켰을 때 백곡을 지나다 마을 노인 이순곤이 이끄는 주민에게 패한 데서 ‘패치’라 불리다가 ‘배티’로 바뀌었다는 설도 함께 전한다.

〔교우촌의 형성〕 배티성지 홈페이지에 따르면 이곳은 사람이 거의 살지 않던 오지이면서 충청좌도·충청우도·경기도의 접경에 있어 박해를 피한 신자들이 숨어 살기에 적합했다. 기록으로 정확히 확인되지는 않지만 신자들이 숨어들기 시작한 것은 1801년 신유박해 이후로 추정되며, 1830년대 초에는 신자들이 사는 교우촌이 여럿 있었다고 한다. 청주교구 성지 소개는 교회사 기록에 진천이라는 이름이 처음 나타난 것이 1813년경(홍주 덕머리 출신 원 베드로 형제가 진천 ‘질마로’로 피신했다는 기록)이며 배티 교우촌의 형성은 1830년 무렵으로 추정된다고 적는다. 디지털진천문화대전은 1830년을 전후해 교우촌이 형성되기 시작해 1866년 즈음에는 15곳에 이르렀다고 설명한다.

〔충청도 최초의 공소〕 배티성지 홈페이지는 1837년 5월 모방(나 베드로) 신부가 샤스탕(정 야고보) 신부와 함께 배티 교우촌에서 3~4일을 머물며 신자들에게 성사를 주었고, 이로써 배티 교우촌이 충청도 최초의 공소로 설정되었다고 적는다. 당시 교회 밀사로 활동하던 김 프란치스코의 집도 이곳에 있었으며, 수원 느지지 출신의 복자 장 토마스와 충주 출신의 복자 송 베네딕토 가족 등이 이후 배티 교우촌으로 이주해 함께 살았다. 기해박해(1839)와 병오박해(1846)를 거쳐 병인박해(1866)까지 교우촌 수는 더 늘었으며, 홈페이지는 기록에 이름이 보이는 교우촌으로 배티·삼박골·은골·정삼이골·용진골·절골·지구머리·동골·지장골·발래기·퉁점·원동·새울·굴티·방축골 등 15곳을 든다. 청주교구는 이곳에 모여든 신자들이 주로 충청도 지역교회의 중심지였던 내포 지방 출신이었고 일부는 경기도와 충주 출신이었다고 설명한다. 신자들은 움막을 짓고 화전을 일구고 숯가마를 운영하며 살았고, 윤의병(바오로) 신부가 박해 소설 〈은화〉의 주요 무대를 이곳으로 삼았다(배티성지).

〔조선대목구 최초의 신학교〕 배티성지 홈페이지에 따르면 다블뤼(안 안토니오) 신부는 1850년 대목구장 페레올 주교로부터 ‘조선대목구 소신학교’ 설립을 명받아 같은 해 9월경 배티 교우촌 가운데 있던 방 두 칸짜리 초가집을 신학교 교사로 마련했다. 이 초가집은 소성당과 사제관을 겸했고 신학생들의 기숙사 역할도 했다. 다블뤼 신부는 1853년 여름까지 배티에 상주했고, 이후 최양업 신부가 신학교를 맡아 신학생들을 지도하며 유학을 준비시켰다. 그 결과 1854년 3월 신학생 3명(임 빈첸시오, 김 사도요한, 이 바울리노)이 말레이시아 페낭 신학교로 유학을 떠났다. 이후 배티 신학교는 문을 닫고 제천 배론에 새 신학교가 설립되었으나, 초가집 성당 겸 사제관에는 최양업·프티니콜라(박 미카엘)·페롱(권 스타니슬라오) 신부 등이 오랫동안 거처했다.

〔최양업 신부와 배티〕 최양업 토마스(1821~1861) 신부는 한국 천주교회의 첫 번째 신학생이자 두 번째 사제로, 1849년 4월 15일 상해에서 사제품을 받았다(배티성지). 최양업 신부는 1853년 여름 배티 신학교의 지도를 맡은 뒤 약 3년 동안 배티 교우촌을 사목 중심지이자 본당으로 삼았고, 경기·충청·전라·경상·강원 다섯 도의 교우촌을 순방하다가 순방이 끝나는 9~10월에는 배티 사제관에 머물며 저술에 몰두해 천주가사, 최초의 한글 기도서 ‘천주성교공과’, 한글 교리서 ‘성교요리문답’을 지었다. 1861년 6월 15일 만 40세로 선종했으며 시신은 같은 해 11월 초 제천 배론으로 옮겨져 안장되었다. 최양업 신부 이후 배티를 거점으로 삼은 사제는 메스트르(이 요셉) 신부(1856년 여름~1857년 8월), 페롱 신부(1857년 8월~1858년 9월, 1861년 10월~1864년 여름), 프티니콜라 신부(1858년 10월~1860년 11월 초), 칼래(강 니콜라오) 신부(1864년 여름~1866)이며, 다블뤼 주교가 배티에서 견진성사를 집전한 것은 프티니콜라 신부가 이곳에 머물던 때였다(배티성지).

〔병인박해와 순교자〕 병인박해가 일어나자 경상도를 순방하던 칼래 신부는 배티 이웃의 삼박골 교우촌(현 백곡면 용덕리)으로 피신해 보름 남짓 머물며 미사와 성사를 집전한 뒤 소학골(현 천안시 북면 납안리)로 거처를 옮겼다(배티성지). 박해 때 배티 일대에서 체포된 순교자는 기록상 34명이며, 이 가운데 지장골 출신 오반지(바오로), 배티 출신 장 토마스, 절골 출신 박경진(프란치스코) 등 8명과 최양업 신부의 모친 이성례(마리아) 등 9명이 2014년 8월 16일 프란치스코 교황에 의해 시복되었다(배티성지 성지의의). 한편 청주교구 성지 소개와 디지털진천문화대전은 병인박해(1866)와 무진박해(1868)로 배티 일대의 교우촌이 일시 와해되었고 순교자가 55여 명(진천 출신 순교자 29명과 무명 순교자 묘 26기)이었다고 적는다. 박해가 그친 1870년 무렵부터 신자들이 다시 모여들었다(청주교구).

〔시복된 순교자들〕 주교회의 시복시성 성지 자료에 따르면 복자 장 토마스는 장주기 요셉 성인의 6촌 형제로 진천 배티에 정착해 신앙생활을 했고, 병인박해 때 청주 포졸들에게 체포되어 진천 관아로 압송되었다가 청주로 이송되어 군대 지휘소가 있는 장대에서 참수형으로 순교했다. 복자 송 베네딕토(1798~1867)와 아들 송 베드로(1821~1867), 송 베드로의 며느리 복자 이 안나(1841~1867)는 배티 교우촌에서 신앙생활을 하다 1867년 봄 서울에서 내려온 포졸들에게 체포되어 진천 관아와 죽산 관아를 거쳐 서울로 이송되었으며, 송 베드로의 딸과 이 안나의 아이를 포함한 5명 모두 순교했다. 3대에 걸친 가족이 모두 병인박해로 목숨을 잃은 것이다.

〔복자 오반지 바오로의 묘〕 주교회의 자료는 오반지 바오로가 순교한 뒤 아들과 몇몇 신자들이 시신을 지장골로 옮겨 인근 야산(현 진천읍 사석리 산109-1)에 급히 안장했고, 151년이 지난 2017년 청주교구 ‘복자 오반지 바오로 묘소 이장위원회’가 유해를 발굴해 진천성당에 안치했으며, 이튿날인 4월 29일 배티성지에서 이장 미사를 봉헌한 뒤 유해와 진토를 새 묘소(현 백곡면 양백리 815-2)에 봉안했다고 적는다.

〔박해 이후와 성지 조성〕 박해가 끝난 뒤 배티는 교우촌으로 재건되었고, 1888년 두세(Doucet) 신부가 백곡 지역을 방문해 ‘배티 공소’를 설정했다(주교회의 자료, 배티성지). 1893년 이곳에 교리학교가 설립되었다(배티성지). 성지로 가꾸어지기 시작한 것은 1977년부터이다(배티성지). 청주교구 연혁은 1977년 9월 장봉훈 신부가 성지 소개 홍보물을 제작·배포하고, 1978년 9월 교구 순교자 현양대회가 배티에서 열렸으며, 1985년 박용수 바오로 신부가 ‘십자가의 길’을 설치했고, 1993년 4월 26일 장봉훈 신부가 초대 관리소장으로 부임했고, 1995년 4월 15일 최양업 토마스 신부 시복·시성 준비 작업이 시작되었으며, 1996년 3월 1일 성전 건축 기공식을 하고 1997년 4월 15일 배티성당 축성 봉헌식을 거행했다고 적는다. 디지털진천문화대전은 건립 시기를 1978년 3월로, 성지 개발 시점을 1976년 9월로 적어 출처마다 연도가 다르며, 2011년 3월 4일 충청북도 기념물 제150호로 지정되었다가 2021년 11월 19일 문화재청 고시로 지정번호가 폐지되어 충청북도 기념물로 재지정되었다고 한다.

건축과 공간

디지털진천문화대전은 성지에 최양업 신부 탄생 175주년 기념 성당(1996년 3월 1일 착공, 1997년 6월 15일 완공이라 적음), 성당에서 야외 제대까지 이어지는 청동 십자가의 길, 야외 제대와 성모상, 초가집 신학교·성당 겸 사제관을 재현한 건물, 양업영성관과 수련관, 무명 순교자 6인 묘역과 14인 묘역, 최양업 신부 동상이 조성되어 있다고 적는다. 6인 묘는 야외 제대에서 산길로 1.3km 떨어진 성재골에, 14인 묘는 6인 묘에서 350m 거리에 있고, 옛 신학교 터는 성지 입구에서 안성 쪽으로 500m에 있으며, 2007년 양업 전시관이 완공되었다. 배티성지 홈페이지는 배티 인근에 순교자 묘소 28기가 있다고 적는다. 연혁은 배티성당 축성 봉헌식을 1997년 4월 15일로 적어(청주교구) 출처마다 날짜가 다르다.

관련 장소와 인물

  • 복자 오반지 바오로 묘소: 배티성지 안에 있다(배티성지).
  • 삼박골: 칼래 신부가 병인박해 때 피신했던 교우촌으로, 순교자 묘가 있다(배티성지, 디지털진천문화대전).
  • 제천 배론: 배티 신학교 이후 새 신학교가 세워졌고 최양업 신부가 안장된 곳이다(배티성지).
  • 소학골(천안시 북면 납안리): 칼래 신부가 삼박골을 떠나 옮겨 간 곳이다(배티성지).

참고자료 및 출처

  1. 배티성지 홈페이지, “성지소개”. 배티의 지명, 교우촌 형성과 1837년 공소 설정, 1850년 신학교, 최양업 신부와 거주 사제 현황, 순교자 34명, 1888년 공소 재설정과 1893년 교리학교.
    https://www.baeti.org/holyland/introduce
  2. 배티성지 홈페이지, “성지의의”. 교우촌 15곳, 신학생 유학(1854), 최양업 신부의 저술과 선종, 순교 복자 9위 시복(2014.8.16), 순교자 묘소 28기.
    https://www.baeti.org/holyland/meaning
  3. 디지털진천문화대전, “진천 배티 성지”. 지명 유래 두 설, 교우촌 15곳, 성지 개발과 성당 건립(1996~97), 충청북도 기념물 지정(2011)과 재지정(2021).
    https://jincheon.grandculture.net/jincheon/toc/GC02701809
  4. 천주교 청주교구, “배티순교성지”. 교우촌의 형성, 순교자 55여 명, 성지 연혁(1977~1997).
    https://www.cdcj.or.kr/parish/holyland/14
  5. 주교회의 시복시성주교특별위원회, “관련 성지: 배티 성지”. 복자 장 토마스와 송 베네딕토 가족의 순교, 1888년 배티 공소 설정, 복자 오반지 바오로 묘소 이장(2017).
    https://cbck.or.kr/koreanmartyrs/Shrines/3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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만들어진 날
2026년 10월 13일 22:3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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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6년 10월 13일 22:3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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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ttps://missamap.com/ko/kr/cheongju-baeti-sungyo-shrine/wiki/
인용
한국 가톨릭 장소백과, "배티 순교 성지", 마지막 수정 2026년 10월 13일 22:39. https://missamap.com/ko/kr/cheongju-baeti-sungyo-shrine/wik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