삼랑진 성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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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차
  1. 개요
  2. 역사
  3. 관련 장소와 인물
  4. 참고자료 및 출처

개요

삼랑진성당은 경남 밀양시 삼랑진읍에 있는 천주교 부산교구 소속 성당이다. 1930년 권영조 신부가 명례 본당을 삼랑진으로 옮기면서 본당 역사가 시작되었고, 밀양 본당 소속 공소로 바뀌었다가 다시 본당으로 승격되었으며 주보는 성녀 소화 데레사이다.

역사

〔복음 전파와 공소〕 한국가톨릭대사전에 따르면 밀양 지역에는 한국 천주교회의 첫 희생자인 김범우(토마스)가 1785년 밀양의 단장(단장면 법귀리)으로 유배된 뒤 배소 일대에 신앙을 전하면서 복음이 전해졌다고 하나, 이때 신자가 몇 명 생겼는지 그 신앙이 후대까지 이어졌는지는 확실히 알 수 없다. 박해가 계속되면서 많은 신자가 산간 지대로 피신해 와 양산읍 호계리(범실)를 비롯해 밀양군 부북면·무안면·상남면·동면 등지에 교우촌이 형성되었고, 1850년대에는 최양업(토마스) 신부가, 그 뒤에는 다블뤼 주교와 리델 신부가 이들 교우촌을 순방했다. 1866년 병인박해 때 이곳에서 처음으로 순교자가 나왔다. 이 무렵 김사범이 가족과 함께 현 삼랑진읍 우곡리에 정착해 옹기점을 운영하면서 인근 하읍실에 복음을 전하기 시작했다. 1888년 로베르 신부가 명례 공소(하남읍 명례리, 현 마산교구 지역)를 설정했고, 1892년 부산의 조조 신부가 읍실 공소(삼랑진읍 우곡리)를 설립했다. 이들 공소는 1898년 1월경 강성삼(라우렌시오) 신부가 명례에 임시 본당을 설립하면서 이에 속했다가, 1903년 9월 19일 강성삼 신부가 사망한 뒤 마산(현 완월동) 본당 관할 공소가 되었다.

〔삼랑진 본당 설립〕 한국가톨릭대사전에 따르면 명례 본당이 정식으로 설립된 것은 공소로 격하된 지 23년 만인 1926년 5월 30일 권영조 신부가 부임하면서였다. 명례는 교통이 불편해 권영조 신부는 교통의 중심지이며 신자 수가 많은 삼랑진으로 본당을 이전할 계획을 세웠고, 1928년 읍실 공소에 임시 성당을 마련했으며, 이듬해 5월 22일 우곡리에 1,500여 평의 부지를 매입해 성당·사제관·청년 회관 신축 공사에 착공했다. 그리고 1930년 1월 1일자로 우곡리로 이전함으로써 ‘삼랑진 본당’이 설립되었는데 설립 당시 신자는 약 900명이었다. 같은 사전의 밀양 본당 항목은 우곡리의 부지를 1,000여 평으로 적는다. 디지털밀양문화대전의 밀양성당 항목은 본당이 하남읍 명례리에서 삼랑진읍 우곡리로 1928년에, 우곡리에서 삼랑진읍 송지리로 1930년에 이전했다고 적는다.

〔송지리 성당〕 한국가톨릭대사전에 따르면 권영조 신부가 1930년 12월 전북 연장리의 한들 본당으로 전임되면서 우곡리의 성당 공사는 중지되었다. 1931년 5월 부임한 3대 주임 파르트네 신부는 1935년 봄 현 본당 소재지인 송지리에 새 부지를 매입하고 성당 신축 공사를 시작했고, 이 공사는 4대 주임 페네 신부가 부임한 뒤 완공되어 그해 11월 3일 성당 봉헌식과 사제관 및 청년 회관의 축성식이 있었다. 당시 삼랑진 본당 신자는 28개 공소 신자를 포함해 약 1,200명이었다. 디지털밀양문화대전의 삼랑진성당 항목은 삼랑진성당이 밀양성당을 모본당으로 하여 1930년 송지리 매봉산 기슭에 임시 성당 겸 사제관을 짓고 개소했으며 당시 신자는 300여 명 정도였다고 적는다.

〔밀양읍으로의 이전과 공소 시대〕 한국가톨릭대사전에 따르면 페네 신부는 1938년 휴양차 마산(현 완월동) 본당으로 갔고, 후임 유흥모 신부가 약 2년 동안 삼랑진에서 거처하다가 1939년 교구의 지시에 따라 밀양읍 내이동 721번지의 부지 700평을 매입해 이듬해 6월 29일 그곳에 성당 겸 사제관을 신축하고 본당을 이전했다. 이로써 삼랑진 본당은 밀양 본당 소속 공소로 격하되었고 성당 부지와 건물은 교구에서 매도했다. 이때부터 신자들은 공소 강당도 없이 개인 집에서 공소 예절을 치러야 했다. 디지털밀양문화대전도 삼랑진성당이 1939년 본당이 밀양읍으로 이전하면서 부지와 건물이 매각되어 폐쇄되었다고 적는다.

〔본당 부활까지〕 한국가톨릭대사전에 따르면 1950년 한국전쟁 이후 삼랑진 공소 신자들은 본당 승격 운동을 추진했으나 소속만 밀양 본당에서 진영 본당으로 바뀌었다. 1951년 ‘성당건축 기성회’를 조직했고 이듬해 삼랑진 읍사무소 옆에 초가 두 채를 매입해 공소 강당으로 쓰기 시작했다. 1953년 삼랑진 공소가 다시 밀양 본당 소속으로 환원되었고, 1956년에는 읍내 중심가에 부지(500평)와 건물(150평)을 매입했다. 1957년 2월 유선이 신부가 부임하면서 삼랑진 본당으로 부활했으나 이듬해 12월 5일 유선이 신부가 사망하면서 다시 밀양 본당 공소가 되었고, 1962년 7월 정수길 신부가 7대 주임으로 부임하면서 본당이 되살아났다. 한국가톨릭대사전의 같은 항목 첫머리와 밀양 본당 항목은 본당 승격 시기를 1957년 3월로 적고, 디지털밀양문화대전은 1930년 개소, 1939년 폐쇄, 1957년 재개소, 1958년 12월 밀양성당 소속 공소로 격하, 1962년 7월 본당 승격으로 적는다.

〔루가원과 1960~1970년대〕 한국가톨릭대사전에 따르면 정수길 신부는 1962년 9월 26일 김해군 생림면 도요리에 음성 나환우 정착촌인 ‘루가원’을 개원했고 그해 12월 18일 본당에 신용협동조합을 설립했다. 디지털밀양문화대전도 1962년 9월 26일 도요리 641에 나환자 정착촌 루카원을 개설했으며 이곳이 지금도 삼랑진성당 관할의 공소로 남아 있다고 적는다. 8대 주임 한영일 신부 때인 1967년 4월 포항 예수 성심 시녀회 분원이 개설되었고, 1968년 8월 약 200평의 성당을 신축 완공해 이듬해 3월 봉헌식을 거행했다. 13대 주임 귈레르모 신부는 1973년 3월 1일 소화유치원을 개원했으나 재정난으로 1981년 폐원했다. 1970년부터 3년 동안 사목자가 잦게 바뀌다가 1973년 손덕만 신부가 14대 주임으로 부임하면서 안정을 찾았다.

〔1980~1990년대〕 한국가톨릭대사전에 따르면 1983년 10월 14일 20년 가까이 본당 사목을 돕던 포항 예수 성심 시녀회가 철수하고 미리내 성모성심 수도회 분원이 개설되었다. 19대 주임 장병룡 신부는 1985년 8월 13일 성모 동굴을 건립했고 이듬해 5월 성당 제대 벽 개조 공사를, 9월 성당과 수녀원 보수 공사를 실시했다. 21대 주임 박유식 신부는 1988년 5월 6일 사제관과 교육관 건립 기공식을 열어 10월 4일 완공해 축복식을 가졌고, 1989년 1월 성당 3층에 성체 조배실을 마련했다. 1990년 10월 28일에는 본당 설립 60주년 기념식과 축하식을 거행했다. 대사전은 삼랑진 본당이 농촌 지역에 있어 신자 수 증가율이 매우 낮고 노년층이 대부분이라 본당 운영에 어려움이 많다고 적는다.

〔교세와 역대 주임〕 한국가톨릭대사전이 적은 교세는 설정 당시 900명, 1963년 716명, 1971년 614명, 1977년 652명, 1982년 788명, 1987년 876명, 1991년 1,116명, 1996년 1,181명이다. 관할 구역은 삼랑진읍 우곡리, 율동리, 행곡리, 안태리, 검세리, 송지리, 미전리, 삼랑리 전 지역과 김해군 생림면 도요리 양지 마을(루가원)로 적혀 있다. 역대 신부는 초대 권영조 마르코(1930.1~12), 2대 민정호 마르코(1930.12~1931.5), 3대 파르트네(M. Parthenay) 테오필로(1931.5~1935.6), 4대 페네(C. Peynet) 가롤로(1935.6~1938.6), 5대 유흥모 안드레아(1938.6~1940.6), 삼랑진 공소 시기(1940.6~1957.3), 6대 유선이 요셉(1957.3~1958.12), 공소 시기(1958.12~1962.7), 7대 정수길 요셉(1962.7~1965.12), 8대 한영일 니콜라오(1965.12~1970.7), 임시 장병룡 요한(1970.7~1971.2), 9대 이상호 라이문도(1971.5~7), 10대 정행만 프란치스코(1971.7~10), 11대 안달원 베드로(1971.10~1972.1), 12대 이돈우 레오(1972.1~11), 13대 귈레르모(S.J. Guillermo) 요셉(1972.11~1973.11), 14대 손덕만 토마스(1973.11~1976.11), 15대 양덕배 요한(1976~1978.6), 16대 송기인 베드로(1978.6~1983.2), 17대 장병보 야고보(1983.2~7), 18대 허성 야고보(1983.7~1984.2), 19대 장병룡(1984.2~1986.2), 20대 정영한 루도비코(1986.2~1988.2), 21대 박유식 안드레아(1988.2~1990.2), 22대 김계춘 도미니코(1990.2~1992.2), 23대 이시찬 다니엘(1992.2~1996.8), 24대 염봉덕 프란치스코(1996.8~1998.2), 25대 김용환 요한(1998.2~)으로 이어진다.

관련 장소와 인물

  • 밀양성당(부산교구): 삼랑진성당의 모본당이다. 본당이 1940년 밀양읍으로 이전하면서 삼랑진은 밀양 본당 소속 공소로 바뀌었다(한국가톨릭대사전, 디지털밀양문화대전).
  • 밀양 명례성당(마산교구): 삼랑진 본당의 전신인 명례 본당이 있던 곳이다(한국가톨릭대사전).
  • 루가원(루카원): 1962년 9월 26일 김해군 생림면 도요리에 개원한 음성 나환우 정착촌이며 삼랑진성당 관할 공소로 남아 있다(한국가톨릭대사전, 디지털밀양문화대전).
  • 김범우 묘소(밀양시 삼랑진읍 용전리 205-1): 디지털밀양문화대전은 한국 천주교의 첫 증거자 또는 첫 순교자로 불리는 김범우의 묘소가 삼랑진읍에 있어 이 지역이 천주교 성지로 꼽힌다고 적는다.
  • 권영조 마르코 신부: 명례 본당을 삼랑진으로 옮긴 초대 주임이다(한국가톨릭대사전).

참고자료 및 출처

  1. 한국교회사연구소, 한국가톨릭대사전 “삼랑진 본당”. 명례에서 삼랑진으로의 이전, 본당 승격과 공소 격하, 성당 신축, 루가원, 교세와 역대 신부.
    https://encyclopedia.catholic.or.kr/entry/3034
  2. 한국학중앙연구원, 디지털밀양문화대전 “삼랑진성당”. 1930년 개소, 1939년 폐쇄, 1957년 재개소와 1962년 본당 승격, 루카원, 김범우 묘소.
    https://www.grandculture.net/miryang/toc/GC08701122
  3. 한국학중앙연구원, 디지털밀양문화대전 “밀양성당”. 명례에서 삼랑진, 밀양으로의 본당 이전 경로.
    https://www.grandculture.net/miryang/toc/GC087011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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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6년 10월 16일 20: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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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6년 10월 16일 20: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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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ttps://missamap.com/ko/kr/busan-samrangjin-catholic-church/wiki/
인용
한국 가톨릭 장소백과, "삼랑진 성당", 마지막 수정 2026년 10월 16일 20:17. https://missamap.com/ko/kr/busan-samrangjin-catholic-church/wiki/